-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30년 전 6월 항쟁의 한 '불편한 진실' 알고 있나
-시간 지나 보니 진정한 승자는 주사파였고 패자는 자유민주주의 세력
-지난 한겨울 '태극기 시위대'는 30년 만에 각성한 넥타이 부대
-좌파가 장악한 교육의 주도권부터 되찾아와야 한다



김철홍 객원 칼럼니스트
영화 ‘1987년’을 2017년 12월 31일 저녁 10시에 보았다. 영화를 본 뒤 머리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맞다. 2017년에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은 사실 1987년에 시작된 일이다”였다. 1987년에 심겨진 씨앗이 30년 동안 자랐고, 그 결과 우리는 2017년을 수확하게 되었다. 도대체 1987년에 무엇이 심겨졌기에 30년 후 우리는 대통령 탄핵과 친북·친중 성향의 정부를 맞이하는 쓴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 영화 ‘1987년’은 나를 30년 전 역사의 그 자리로 데리고 가서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한 수 한 수의 복기(復碁)를 통해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영화 ‘1987년’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스토리의 중심인물은 박종철 군이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그는 87년 1월 13일 자정에 하숙집에서 연행된 지 하루 만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조사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영화는 그의 죽음이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만을 묘사할 뿐, 경찰이 왜 그를 연행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학생으로만 묘사한다. 과연 그는 순수한 의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이었을까?



박종철 군은 당시 학생 운동권 안에서 ‘제헌의회그룹’(Constituent Assembly Group)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민추위의 깃발사건(CA사건)

1985년10월29일, 검찰은 서울대생으로 이루어진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3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17명을 수배한 사건이며 일명 ‘깃발’사건으로 불린다. ‘깃발’은 이념논쟁을 위한 홍보책자였다. 민추위는 노동문제투쟁의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연락책 등 4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각 대학에 三民鬪委을 결성하고,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을 주도하는 한편,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시위 등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검찰은 이를 ‘자생적 사회주의’로 규정했다. 

이 사건으로 박문식(철학4), 문용식(국사 3휴), 안병룡(국사4휴), 황인상(무역졸), 이종원(지리4), 민관홍(인류4), 윤성주(동양사 3년), 이종원(지리4휴학), 조경애(의류과 졸), 이홍균(인류4년), 성명섭(공법과졸), 김태룡(경영4년), 민병렬(사회4), 윤성주(동양사3), 이홍구(공법3), 김희갑(동양사2), 김재광(영어교육4), 박충렬(법학졸), 장혜경(중문4), 김찬(국사3 제적) 김신훤((정치4), 유경완(무역4), 김형섭(농대졸), 석미주(종교3 제적), 황경희(경북대 불문과 졸) 등이 구속되었고,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도 문용식에게 민족민주혁명 이념교양을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 중 박문식은 공인회계사와 21세기 프론티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황인상은 변호사로, 문용식은 나우콤의 사장과 김근태 계열과 관련 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문용식은 현재 인터넷 개인방송 아프리카를 운영하며 이번 촛불집회를 집중 보도하다가 2008년6월16일 저작권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깃발사건은 ND(National Democracy: 또는 PD) 그룹의 대표적인 조직 사건이었고, 문용식은 <깃발> 작성의 주역이자 민추위 위원장이었다. 좌파들에 의하면 문용식의 문장력은 유시민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민추위는 이태복(1950년생, 국민대 법학, 1981년 투옥되어 1988년 특별석방, 2002년 김대중에 의해 보건복지부 장관)의 후배들 즉 학림계열이 주축이 되어 1984 년경에 만든 비공개조직으로 박문식(78학번)과 문용식(79학번)이 주축이었고, 이 민추위가 중심이 되어 이후 삼민투와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라는 대중투쟁조직을 만들었다. 이 민추위의 노선을 담은 팜플렛이 바로 ‘깃발’이었다. 


당시 ‘깃발’이 운동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1985~1986년의 학생운동은 사실 이 깃발과 반-깃발 진영 사이의 노선투쟁으로 이어졌다. 깃발은 ND(PD),  강철서신은 NL을 대표했다.  운동권에서는 깃발 진영을 '개구리'라고 부르고 반깃발 진영을 '뽀드득'이라고 불렀다. '개구리'란 깃발(flag)과 영어 발음이 비슷한 frog를 차용한 표현이었고, '뽀드득'이란 안티플라그(anti-plague) 치약의 뽀드득을 흉내 낸 것이라 한다. 

‘깃발’은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당 세력을 기회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정치리더십을 넘겨줄 경우 피는 민중이 흘리고 투쟁의 과실은 기회주의자들이 가로챌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피해의식으로 인해 이들은 민중당, 민주노동당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개헌을 둘러싸고 민정당 등 당시 집권세력은 '호헌'을 내세웠고, 양김씨의 신민당은 '직선제 개현'을 요구했다. 그러나 깃발 그룹은 ‘제헌의회 소집’(CA:Constituent Assembly)을  요구했다. 

해방 이후 제헌의회가 구성된 적이 있었지만, CA 그룹이 상정하고 있는 제헌의회의 모델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의 제헌의회였다. 즉, 혁명에 의해 기존의 전제적인 반동 정치권력을 타도 무력화하고 민중들이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 민중이익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 것이 유명한 CA 슬로건 즉 “파쇼 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한 것이었다. 

깃발 그룹은 1985년 대중조직인 삼민투의 미국문화원 점거투쟁 등을 통해 학생운동의 리더십을 장악했지만 1986년 들어 이른바 강철서신으로 대표되는 자민투가 등장하면서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점차 NL 그룹에게 뺏기고 있었다. 특히 NL 그룹이 보수야당의 직선제 개헌요구 투쟁에 동참하면서 적어도 대중성이라는 점에서는 CA 그룹은 NL 그룹을 따라잡기 어렵게 됐다. 운동권에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NL은 인간성은 좋은데 머리가 나쁘고, PD(ND)는 머리는 좋은데 인간성이 나쁘다" 신지호는 PD계열이었다. 

문용식은 1985년에 깃발 사건으로 구속되고 깃발 그룹은 엄청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민추위 위원장은 문용식이었지만 실제로 그 배후는 78학번이었던 최민이었다. ND(PD) 그룹의 정치투쟁 노선이 CA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최민이었다. 그래서 문용식은 공안당국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최민을 보호하기 위해 김근태를 끌어들였다. 깃발 사건의 배후를 묻는 공안기관의 추궁에 문용식이 "우리의 배후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인 김근태"라고 허위 진술을 한 것이다. 문용식이 김근태에 엄청난 빚을 진 것이다. 문용식이 나우콤 대표로서 김근태의 후원자로 활동했던 것도 과거의 빚 때문일 것이다. 

민청련은 1985년 당시 우리나라 운동권의 유일한 대중 운동조직이었고 그 대표(의장)인 김근태는 그만큼 엄청난 운동 및 정치적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김근태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가한 것은 이후 5공세력에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당시 운동권세력은 정권을 찍어내릴 만큼 세력이 컸던 것이다. 또한 깃발/CA 그룹의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박종철이 고문을 당해 죽었다. 이 두 사건이 5공의 몰락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깃발/CA는 80년대 변혁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1986년5월을 전후하여 CA는 “파쇼하의 개헌반대,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CA 그룹은 “헌법제정민중의회”소집투쟁을 주장하면서, 산하 학생조직으로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民民鬪)계열을 지도했다. 民民鬪계열은 1986년 5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全民學聯)을 결성하여 1986년 여름 방학을 전후하여 신민당사농성투쟁, 성남공단지역 선전작업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최민(서울大 78, 징역 7년), 윤성구(서울大 78, 징역 6년), 민병두(성균관大 78, 징역 5년), 김철수(서울大 75, 징역 5년), 김성식(서울大77, 징역 5년), 유강근(서울大79, 징역 4년), 이선희(서울大 79, 징역 3년), 강석령(서울大79, 징역 5년), 김현호(성균관大79, 징역 7년), 김찬(성균관大77, 징역 2년), 한승권(서울大81, 징역 1년 6월), 이호균(서울大 78, 징역 2년), 차호정(서울大 79, 징역 1년 6월), 김옥수(한국한국外大 81, 집행유예), 하윤숙(서울大 79, 집행유예) 등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CA 그룹의 핵심이론가라는 최민은 열우당 중앙위원, 민병두는 열우당 정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김성식은 현재 한나라당 의원이다. 김성식은 손학규가 경기지사를 할 때 부지사를 하다가 손학규가 탈당을 하면서 MB캠프의 핵심참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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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2월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兩)김씨의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되고 이들이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개헌국면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헌의회그룹’은 직선제 개헌투쟁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직선제 개헌 투쟁은 결국 정치적 주도권을 쁘띠부르주아 세력인 신민당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전술은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멘셰비키혁명)이 성공한 뒤 레닌과 볼셰비키는 멘셰비키가 주축이 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과, 권력을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에 넘길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박종철 군이 속한 ‘제헌의회그룹’은 러시아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파쇼 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구호(slogan)을 채택하고 86년 5월부터 혁명투쟁의 전위부대가 되어 비타협적인 선도적 투쟁을 시작했다.

박종철 군도, 그리고 그를 고문해서 검거하고자 했던 박종운(서울대 사회학과 81학번) 군도 사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인민민주주의였다. 그들은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지하서클 소속이었고, 그들의 구호는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했고, 볼셰비키 혁명을 모델로, 레닌을 롤 모델(role model)로 하여 공산혁명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제헌의회 그룹은 당시 주사파(NL파)와 대립하고 있던 영향력 있는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당시 20대의 어린 나이였다는 것과 전술 선택의 미숙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고 보인다. 그러나 영화 ‘1987년’은 이런 점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1987년’에서 미처 다루지 않지만 87년을 이해하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건은 86년 4월 28일에 김세진(서울대 미생물학과 83학번), 이재호(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 두 학생이 전방입소교육에 반대하여 분신(焚身)한 사건이다. 당시 남자 대학생들은 5박6일간 군부대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교련 1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이 두 사람은 입소당일 아침 신림역 사거리에서 전방입소 반대 시위 중 분신하였다. 이한열 군의 죽음은 계획되지 않은 사고였지만, 이들의 죽음은 준비된 희생이었다. 그들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감상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대학가에 주체사상파의 등장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시위에서 사용된 구호는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였다. 이런 구호는 주적(主敵)을 군사독재로 보지 않고 미제국주의로 본다. 미군철수와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위키피디아 ‘김세진’ 각주 1번 참고)를 외쳤다는 점에서 이들은 ‘독재타도’를 외쳤던 그 이전의 학생운동과 명확히 구분된다. 이 구호들은 왜 문재인 정부가 원전(原電)마저 제거하는 반핵노선을 걷고 있는지 예언적으로 보여준다. 85년 가을부터 반제국주의(Anti-Imperialism)그룹이란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학생운동의 주류가 된 그룹이 있었다. 86년 봄이 지나가면서 이들은 가면을 벗고 자신의 본얼굴을 당당하게 공개했다. 그들은 주사파였다. 주사파가 커밍아웃한 이래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아침 인사는 “어제 밤 대남 방송 들었냐?”였다. 못들은 학생은 들은 학생한테 방송 내용을 전달받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1987년이 되면서 주사파는 학생운동의 대다수 조직을 장악했다. 주사파는 신민당이 주도하는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주체파와 달리 제헌의회 그룹은 직선제 개헌에 미온적이었고, 소수파였기 때문에 87년 6월 항쟁의 주도하던 대학생 시위대의 대부분은 주사파였다. 제헌의회 소집파에 속한 박종철이 희생되었을 때, 주사파는 그의 죽음을 직선제 개헌 투쟁에 적극 활용하였다. 영화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시위대는 대부분 주사파였다. 제헌의회소집파가 훗날 PD 계열(People's Democracy/민중민주, ‘계급모순’을 강조)로 계승되었으므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자체만을 놓고 보면 PD 계열의 희생을 기반으로 해서 NL주사파(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 ‘민족모순’을 강조)가 직선제 투쟁에서 약진하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방명록에 “고맙다”라고 쓴 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박종철의 희생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은 남한의 주사파만이 아니다. 박종철 군은 1987년 3월 3일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학부 조선어학과 3학년에 등록되어 89년 8월 10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분신자살한 김세진 군에게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이 추서된 것이나, 이재호 군이 2006년 북조선에서 민족민주애국렬사에 추서된 것에 비하면 그 등급이 낮긴 하지만, “당시 서울대총학생회는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통일뉴스’ 2006년 1월 4일 기사 “南 열사.학생 31명, 北 ‘명예학생.인사’ 등록” 참고) 그나마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박종철 군이 인문대 언어학과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다른 전공이 아닌 조선어학과에 등록시킨 것은 매우 세심한 배려라고 여겨진다(참고로 이한열 군도 1987년 7월 11일 평양의과대학 의학부 의학과 2학년에 등록되어 1992년 3월에 졸업했다. 경영학과 학생이 의대생으로 된 것이 본인 의사에 따른 것인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자 직선제 투쟁은 대중적 호응을 받기 시작한다. 6월 10일에 예정된 규탄대회 하루 전 이한열 군(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이 최루탄에 직격탄을 맞아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6월 10일부터 대학생들의 가두투쟁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넥타이 부대가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정부가 6월 10일에 직장인들을 조기퇴근 시키고, 도심을 지나가는 지하철을 무정차 통과시켰기 때문에 도심의 직장인들은 회사에서 일찍 나왔는데 집으로 갈 교통수단이 없어 시내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머타임 때문에 해가 길어진 터라 시위대에 일반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호조건이 만들어졌다. 만약 넥타이부대가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주사파가 주도하는 6월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종철 군과 이한열 군의 희생이 6월 항쟁 성공의 필요조건이었다면 넥타이부대의 합류는 충분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지금까지 1987년 헌법 체재 하에서 30년을 살아왔다.

그렇다면 87년 6월 항쟁의 승자는 누구였고 패자는 누구였나? 얼핏 보면 군사독재정권이 패자고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민중이 승자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하지만 6월 항쟁을 운동권 내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진정한 승자는 주사파였고, 진정한 패자는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었다. PD 계열도 그 때 NL에게 밀린 이후로 지금까지 기를 못 피고 있다. 2017년 11월 7일 유투브로 올라온 영상(“주사파에게 ‘체제전쟁’ 선포한 이종혁 의원”)에서 자유한국당 이종혁 최고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국민들에게 정부선택권만 돌려주면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번영된 나라로 잘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오늘 이것이 전략적 오류였음을 저는 오늘 국민여러분께 자인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주사파가 나라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에 성공한 김영삼 계의 후예는 30년이 지난 후에 이렇게 말한 셈이다: “우리가 속았다.”

그러나 어디 속은 게 이종혁 최고위원뿐이겠는가? 사실 넥타이부대도 속았고, 멋모르고 시위에 참가한 모든 대학생, 시민들이 다 속았다. 넥타이부대의 승리는 결국 주사파에게 ‘네다바이’ 당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랐기에 당했다. 당시 30대 40대의 넥타이부대는 30년의 세월이 흐른 2017년에 “우리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거리로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2017년의 태극기부대의 60대 70대는 다름 아닌 1987년의 넥타이부대다. 2017년 3월 1일 서울 도심에 태극기를 들고 모인 수십만의 시위대는 30년이란 긴 기만(欺瞞)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 거짓에서 깨어나 각성된 시민이다. 이들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넥타이부대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질까?

직선제 개헌이 성공한 뒤 신민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주사파를 포함한 반국가세력은 신민당의 그늘 뒤에서 ‘민주화세력’이라는 완장을 차고 신분세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87년부터 민주화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확장해왔고, 그 과정에서 주사파의 세력과 영향력도 함께 확장되었다. 민주화세력 내부에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세력이 섞여 있었지만 자유민주 세력과 인민민주 세력은 서로를 도와주고 보호해주었다. 그래서 반(反)국가세력을 제거하려고 하면 ‘왜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느냐?’고 야단치면서 국가보안법을 무력화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이 386 운동권 출신의 간첩단 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다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이제 그만 하시라”고 권유받고 사임한 사건이다(위키리크스 공개 미국 외교전문 참고). 그래서 남조선 인민해방 혁명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점점 더 넓어져 왔다. 그래서 2017년 드디어 1987년 6월 항쟁의 주체가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하게 되었다.

자 그럼 이제 2018년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초중고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한다. 좌파들이 교육을 장악하고 생산라인에서 좌파이념에 친화적인 세대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데, 이걸 그냥 내버려둔 채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영화 ‘1987년’에서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식 분)은 이렇게 말한다. “똑똑히 새기라우. 내래 빨갱이 잡는 거 방해하는 간나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하갔어” 제5공화국 때부터 우파가 범한 결정적 실수는 이념전쟁을 대공(對共)부서에 일임하고 검거로 이념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반국가세력의 핵심 분자는 검거해야 한다. 하지만 계속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나머지 대중들은 검거로 해결이 안 된다. 자유민주 세력은 그 동안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 경제제도를 지키기 위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깊이 있게 가르치지 않았던 점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이제 초중고 교육의 주도권을 되찾아 와야 한다. 마침 2018년 6월에는 전국 17개 선거구에서 교육감 선거가 있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자유민주 세력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다. 2014년 교육감 선거에서는 보수 2명, 중도,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3명은 친전교조 성향의 교육감이 선출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승리해서 교육을 바로 잡으려면 첫째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갖고 교육이란 전쟁터에서 상대와 맞장을 붙을 수 있는 전사(戰士)가 선거전에 나가야 한다. 이념적으로 나약한 교육전문가가 보수랍시고 표를 얻어 교육감이 된 뒤에 좌파들 정책에 협력하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둘째로, 자유시민 교육감 후보들은 자발적으로 단일화 과정에 참여하여 민의가 결집되게끔 호소한다. 2018년에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30년 동안 묵혀놓은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기 시작하는 원년(元年)이 되길 기도한다.

김철홍 객원 칼럼니스트(장신대 교수)


1987년 6월 항쟁에 나섰던 '넥타이 부대'는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7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들었다(연합뉴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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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이 무서운 기세로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무얼 다루는 영화일까?





1987년도의 민주화 운동?




1.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화' 라는 단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2.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공안 사건'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바로 이것이다.





공안 사건이라고 함은, 192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내에 들어온 공산주의가 1980년대 대한민국 운동권을 타고 들어와서

1987년부터는 자생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주사파' 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1. 민주화  2. 주사파    

이 두 가지 흐름은 같이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사파 세력의 사건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 과정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민주화 과정에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과 자생적인 세력으로 확장한 

주사파 세력이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은폐되고 감추어 졌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색깔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레닌 - 마르크스 로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이념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 북한내에 들어왔고, 이것이 대한민국내에 북한을 통해

계속적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무서운 것은, 이 일들을 치밀하게 전개해 왔다는 것이다.

단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기울고 있다. 왼편으로, 왼편으로 기울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선에 다달았을 때는 공산화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듣기 싫은 것을 틀렸다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듣기 싫은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색깔론'이 그렇다.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 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왜 아직도 북한을 가지고 그러냐 -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심히.....좌경화의 길을 넘어....

자유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절차를 밟고 있다.






그나마 버티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해준 미군, 그리고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편들고 싶어서 편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미국이었고, 지금도 미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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