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위상은 얼마나 추락했을까...


친북, 친중 정부   vs    한미, 한미일 동맹
우리는 어느편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일까?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바로 6.25




  양상쿤 전 중국 국가주석(1907~1998)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과 중앙군사위 비서장을 겸하면서 마오쩌둥 주석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그는 1997년 5월 3일, 회고록 집필을 위해 중앙판공청고 ㅏ중앙군사위에서 일했던 원로 인사들과 만나 당시 상황을 회상한 바 있다.


그동안 많이 알려진 사실이기는 하지만, 양상쿤 전 주석이 직접 관련 내용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은 그의 회고록을 추린 것이다.





1949년 4월, 북한은 미군이 곧 남조선(한국)에서 철수를 할 것이며, 이승만 집단은 미군 철수 이후 북조선(북한)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수상은 소련에는 서둘러 무기장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중국에는 사람을 보내 병력 지원을 요구했다.

마오쩌둥 주석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 집단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중국은 조선을 지원할 것이다. 다만 중국이(대만 국민당 정권과의)

해방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을 기다려달라.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다음에는 중국 인민해방군내 조선족 군관들과 병사들은 조선 인민군

에 넘겨줄 것이다. 그러나 조선반도(한반도) 통일 문제는 현재 국제정서로 보건대 단기간내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없다."


 1950년초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과 대만이 미국 방어선 안에 있지 않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결정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충돌을 우려하던 스탈린의 고민을 풀어주었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극비리에 소련을 방문해 조선반도를 통일할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5월 13일, 김일성은 중국에 와서 스탈린이 조선반도 통일계획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그자리에서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소련

측에 확인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중국 주재 소련대사 로신을 심야에 불러 김일성에게 했다는 스탈린의 확약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 대사가 김일성 발언이 사실이라는 스탈린 답신을 들도 마오쩌둥을 찾았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은 

압록강변 중국 국경지대에 3개 군 병력을 배치하겠다. 미국이 참전해도 38선을 넘지 않으면 해방군도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중국은

참전할 필요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으로 예상을 했다.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내려갔을 때인 7월 2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소련대사 로신을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만일을 위해 중국은 중국과 조선 국경지대에 9개 사단

병력을 집결시키려 한다. 미군이 일단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지원군 이름으로 조선에 들어가 미국 침략군과 맞설 것이다. 소련은 공중엄호를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7월7일과 7월1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두차례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즉각 병력을 동원해 동북변방군을 창설하도록 했다. 변방군 병력은 26만명까지 늘었다. 

 10월1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에게 38선을 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스탈린은 전보를 보내 중국이 적어도 5,6개 사단을 파견하라고 부탁했다. 중국 군대가 서둘러 38선 부근으로 접근해야 조선인민군이 후방에서 역량을 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특사 박헌영을 베이징에 보내 군사지원을 정식 요청했다.

 

   10월2일 새벽, 마오쩌둥은 급전을 보내 동북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가오강(高崗) 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 서기를 베이징에 즉각 올라와 조선정세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10월2일 오후, 마오쩌둥은 중앙서기처 회의를 소집해 주재했다. 마오쩌둥은 미국과 직접 전투를 벌이면 이길지 속단할 수 없지만, 참전하는 것이 참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강조했다.              

10월4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주재했다.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마오는 하룻동안 회의를 열어 조선 참전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전에는 참전해야 하는 사안을 놓고 줄곧 논의했다. 오후에는 참전해서는 안되는 사안을 놓고 협의했다. 당시 토론 상황을 보면 기본적으로는 참전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논리는 간단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이긴 지 얼마되지 않아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경제도 회복을 하지 못했는 데 조선에 들어가 참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그날 오후에 서북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펑더화이(彭德懷)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북국 서기가 사무실이 있는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는 참전을 반대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났을 때 마오가 “참전을 하지 말자는 주장은 모두 이치에 맞다”며 “다만 조선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 만큼 우리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밝혔다. 펑더화이는 회의에 늦게 참석해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만큼 회의석상에서는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회의가 끝나자 서둘러 내(양상쿤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오전 회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10월5일 오전, 마오는 펑더화이를 단독으로 만났다. 펑더화이는 “어제 밤새 생각을 했는데, 마땅히 참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원군 사령관을 맡아 참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날 오후 정치국 확대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펑더화이는 미국과 싸우고,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는 전쟁을 하면 건설에 영향을 미친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며 이것은 별다른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썩은 것이 있다면 잘라내고 다시 지으면 된다. 해방전쟁 승리가 몇 년 더 늦춘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이 조선 전체를 먹으면 수시로 구실을 찾아 도발할 것이며, 침략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늦게 참전하는 것이 일찍 참전하는 것만 못하고, 참전하지 않으면 후환을 남길 것이다”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중국, 소련, 조선 세나라를 삼두마차에 비유했다. 마차는 세필의 말이 끄는 것인데, 두 필의 말이 고집을 부리며 전진하겠다는 데, 다른 한마리는 버틸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회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데 소련 손님이 찾아왔다. 마오는 회의장을 떠나 거처인 펑쩌위안(豊澤園)에 가서 소련 손님을 만나고 20분 정도 있다가 회의장으로 돌아왔다. “보라. 두필의 말이 반드시 끌고 가겠다는 데, 우리가 안끈다고 어떻게 되겠나” 회의는 즉각 결정했다. 펑더화이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가기로 했다.

 

  10월8일, 마오는 중국인민지원군을 구성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같은 날, 마오는 전보를 김일성에게 보내 중국이 지원군을 구성했음을 통보했다. 펑더화이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겸 정치위원을 맡아 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는 사실도 전하고, 중국통인 북한 내무상 박일우를 선양(瀋陽)에 오도록 해 펑더화이, 가오강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 국경안으로 들어가 작전을 벌이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10월8일,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는 소련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다. 소련의 군사원조와 중국 지원군에 공중엄호를 제공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스탈린은 16개 공군 여단을 중국 지원군에 제공해 공중엄호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다만 2, 3개월의 준비작업을 한 다음 전투기를 출동시키겠다며 발을 뺐다. 소련이 당장 공군을 보내 중국 지원군 공중엄호를 해줄 수 없다고 한 만큼 저우언라이는 부득이 전보를 마오에게 보내 이런 사실을 알렸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는 펑더화이, 가오강에게 전보를 보내 지원군은 현지에서 출동을 하지 말고 훈련을 계속 하도록 지시하면서 두사람에게 베이징에서 와서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청했다. 펑더화이, 가오강은 10월12일 베이징에 도착했고,  이튿날인 10월13일, 마오는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참전하느냐, 마느냐를 다시 논의한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마오는 중국과 조선은 순망치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관계라고 강조했다. 미군이 압록강변에 도달해 중국과 대치하는 것은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은 토론을 거듭 했고 마침내 참전 결정을 내렸다. 소련의 공군 지원이 당장 없다고 해도 말이다.  



출처: http://inpyohong.khan.kr/175 [차이나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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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김일성) + 중국(마오쩌둥) + 소련(스탈린)





한반도는 김일성과 소련에 의한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지원군 명목을 중공군이 참여하면서 


말 그대로 한반도는 최후 전선까지 밀렸고, 공산화가 되기 직전까지 갔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미군의 참전, 유엔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수복하기에 이르고, 수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과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투에 휴전 협정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한 나라였다.


미군의 참전, 그리고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반도는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휴전 협정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6.25 전쟁을 통해 미군은 3만여명에 이르는 희생을 냈다.


연고도 없던 나라에 와서 3만여명이나 되는 희생을 감수한 나라.....







그런데 지금의 문재인 정권은 반대로 가고 있다.


마오쩌둥을 존경한다고 서슴치 않고 내뱉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국가원수가 되는...지금의 상황....


대한민국은 잘 못 가도 한참을 잘 못 가고 있다.








우리의 적이 중국, 북한, 소련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헌법에서 '자유'라는 단어까지 빼려고 한다.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공산국가)를 세우고 있는 문재인 정부를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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